여행

홍성 가볼만한 곳 김좌진장군 동상 청산리대첩

Schos 2021. 6. 15. 07:59

홍성에 와서 잠시 볼일을 보고 걷다가 멀리서 김좌진 장군 동상이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게 보입니다.
어릴적 아이들과 한데 모여서 동상 주변에서 놀았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역사에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마냥 뛰어 놀기만 했었고 그때는 동상이 엄청 커보였답니다.

잠시 둘러보면서 김좌진 장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옛날에는 동상 하나만 있고 집들이 촘촘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문화사업으로 주변을 잘 정리하여 어디서든 김좌진 장군 동상이 한눈에 보이게 해놓았습니다.
아마도 백야 김좌진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김좌진 장군은 음력으로 19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 1월 24일 사망하였습니다 .
호는 백야이며 김좌진 장군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이이며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였으며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일을 해 보여 이웃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는 나이 불과 17세에 자기 집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80칸이나 되는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자기는 초가집으로 나가서 살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의 강하였다고 합니다.

 

 

홍성은 옛날부터 영웅이 많이 나타난 곳입니다.
괜히 제가 뿌듯해지면서 자랑스럽습니다.
영웅으로 고려시대에 최영 장군이 태어났고, 만해 한용운도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홍성에서 자랐으니 백야 김좌진 장군의 등장은 조금 더 이상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집터를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던 터는 지금도 홍성에 갈산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어려서 서당 공부를 했고 16세에서 18세까지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뿐 다른 정규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는데 장군의 글씨는 다른 어느 부모님보다 뛰어났고 학식 또한 높아 문무를 겸비하였습니다.

 

계단을 올라와보니 포토존이 있습니다.

옛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후손들에게 "너희는 절대 나와 같은 군인이 되지 말라"고 유언을 할 정도로 조선시대부터 문인과 무인중 무인을 홀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척박한 환경속에서 김좌진 장군 같은 무인 영웅은 기적과도 같은 거였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자면, 좋은 분들,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피겨스케이트에서 김연아 선수가 나온것과 비슷하겠지요..)

 


김좌진 장군은 나이 19세에 한성 신부라는 신문사 이사가 되었고 오성학교 교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하여 애국교육 운동에 나섰으니 김좌진 장군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문인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기둥은 기울고 있었고 교육이나 언론만으로 나라로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는 것을 김좌진 장군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은 오로지 무력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군자금을 모으기로 하였으나 군자금을 모집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2년 6개월에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면서 [단장지통]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김좌진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겠다는 필생의 숙원 사업에 착수 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에 상해 임시 정부가 수립된 군정부라는 이름을 북로군정서로 바꿔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가 지원해 준 돈 1만원으로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1만원이라는 돈은 화폐가치로는 적은 돈이지만 1919년 시대에는 어마어마한 돈이였겠지요..

다음해인 1920년 9월 제 1회 졸업생 298 명은 배출하고, 이어 일본 침략군과 청산리에서 독립 전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 21에서 26일, 6일간 청산리 80리 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총장), 박영희(부관), 이범석 (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 천수평, 마록구등 등지에서 일본군 동지대의 격전을 전개해 일본군 3,300명 일시에 섬멸하였는데 이를 청산리전투라고 합니다. 세계전쟁 사상 유례없는 대전과를 올렸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 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작년 2020년이 청산리 대첩(전투) 100주년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민족의 사기를 드높인 장군의 역사적 위치는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은 북간도를 떠나 낯선 시베리아 땅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처음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과연 소련공산당의 독립군 원조는 속임수였다는것을 알고 자유시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무사하였으나 다른 많은 독립군은 소련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간도 땅을 밟은 김좌진은 옛날 우리의 발해 수도였던 영고탑에서 신민부라는 군사 단체를 조직하여 새로이 성동사관학교를 세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교포사회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한족총연합회 주석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은 박 상실이라는 자가 손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향년 41세 였다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 동상을 보고 장군의 일생을 적어보면서 간략하게 청산리 대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